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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보팀 조회수 3965 작성일 2023-12-01 오후 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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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번역문 정정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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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번역문 정정에 대한 단상

박 현 석

홍익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2023년 6월 9일 관보 제20518호에 따르면, 수십 년 전에 체결된 다자조약 3건의 번역문이 정정되었다. 조약 제697호(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조약 제1007호(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조약 제1008호(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선택의정서)가 그것이며, 해당 조약의 정본은 달라지지 않았고 번역문만 정정된 것이다.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 조약의 정본(authentic text)과 번역본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정본이 우선하겠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관보에 게재된 번역문이 ‘공포’된 조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법률 등 공포에 관한 법률’ 제11조 제1항에 따르면, 조약의 공포는 관보에 게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법령상 관보에 조약의 번역문을 싣는 근거는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인 것으로 보인다. 이 조항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다만 이번에 번역문이 정정된 다자조약 3건은 모두 국어기본법이 제정된 2005년 7월 28일 이전에 체결되었으므로, 종전 번역문을 게재한 근거는 1948년 10월 9일 제정되었다가 국어기본법을 제정한 날 폐지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인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쓰되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이 법률의 전부지만, 일반 국민이 알기 쉽게 작성하라는 취지라면 ‘한국어’로 써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관보에 게재된 번역문과 종전의 번역문을 비교해 보면, 단순한 자구 수정 이상의 정정도 여럿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19조의 제목인 ‘formulation of reservations’의 번역은 ‘유보의 형성’에서 ‘유보의 표명’으로 정정되었고, 같은 협약 제43조 본문 중 ‘the invalidity of … a treaty’의 번역은 ‘조약의 부적법’에서 ‘조약의 무효’로 정정되었다. 또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28조에도 또 그 선택 의정서 전문(前文)에도 등장하는 ‘Human Rights Committee’의 번역은 ‘인권이사회’에서 ‘인권위원회’로 정정되었다. 다만 ‘인권이사회’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미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설치된 Commission on Human Rights와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2006년 유엔 총회는 경제사회이사회에 설치된 이 기관을 없애고 총회 산하에 Human Rights Council을 설치했는데, Human Rights Committee의 번역을 ‘인권위원회’로 정정한 데에는 이 사실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의심스러운 번역이 정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은 것도 있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거듭 등장하는 ‘consent to be bound by a treaty’의 번역은 여전히 ‘조약에 대한 기속적 동의’이고(제2조 제1항 나호에서는 ‘조약에 기속되겠다는 동의’로 변경되었음) ‘object and purpose of a treaty’의 번역은 여전히 ‘조약의 대상 및 목적’이다. 이 두 문구는 각각 ‘조약에 구속되겠다는 동의’, ‘조약의 취지 및 목적’이 적절한 번역으로 보이지만 이번 정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조약문의 번역도 어렵지만, 그 번역문의 정정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예컨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양쪽에 모두 등장하는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의 번역을 정정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의 번역을 본뜬 ‘국제사법재판소’라는 번역이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영어 court는 원래 ‘법원(法院)’이 아니라 ‘뜰’이고1) court of law는 형평법이 아니라 common law를 적용하는 법원이므로 ‘법원’을 가리키는 영어는 court of justice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국제법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유엔 헌장 정본의 하나인 중국어본에도 ‘国际法院’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미 널리 쓰이는 종전의 번역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 정정으로 바람직한 번역이 되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있다.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여러 번 등장하는 ‘child’와 ‘children’의 번역이 ‘어린이’에서 ‘아동’으로 변경된 것이 한 가지 예이다. 또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32조의 ‘leaves the meaning ambiguous or obscure’의 번역은 ‘모호해지거나 애매하게 되는’에서 ‘모호해지거나 불명확하게 되는’으로 변경되었는데, 중국어본에는 ambiguous가 ‘不明’이고 obscure가 ‘難解’인 반면 일본어 번역본에는 전자가 ‘あいまい’, 즉 曖昧이고 후자가 ‘不明確’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obscure의 어원인 라틴어 obscurus가 어둡다는 뜻이므로 그런 뜻의 ‘昧’가 들어있는 ‘애매’가 obscure의 적절한 번역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쪽인지 불분명하다는 뜻의 ambiguous를 ‘모호’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불확실해 보인다. 이런 경우에는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괄호 안에 한자나 원어를 명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 방법은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 단서와 이 법 시행령 제11조가 명시적으로 허용한 것이니 말이다.

1) 미국 연방대법원 직원들은 법원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실내 농구장을 ‘the highest court in the land’로 부른다고 한다. B. Schwartz, A History of the Supreme Court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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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8 호 | 발행일 2023년 1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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