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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보팀 조회수 2457 작성일 2024-08-01 오전 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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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법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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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법의 정치화

노 혁 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회사법이 인기다. 로스쿨 체제 도입 후 가장 선호되는 취업지가 대형로펌인 탓에 학생들이 회사법을 열공한다는 것도 있지만, 법률문외한인 지인들조차 심오한(?) 회사법리에 대해 물어오곤 한다. 사법(司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만은 못하겠지만 회사법의 정치화는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회사법리가 신문의 경제면뿐 아니라 정치면, 사회면까지 진출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국가 권력구조 등을 다루는 탓에 정치적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는 헌법을 논외로 하면, 회사법의 정치적 지위 상승은 다른 법 영역에 비하여도 도드라진다. 민법, 형법, 행정법 등 다른 법에 관해 정계 또는 언론지상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정치권이 회사법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표가 걸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Covid 19의 산물 중 하나가 소액주주들의 확대이다. 2019년 말 618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상장법인 주주 숫자가 Covid 19를 거치면서 2023년 말 141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한국예탁결제원 자료). 주주들의 권익을 다루는 회사법 향배가 표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둘째로 우리 삶에 미치는 기업의 영향력이 점점 더 팽창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념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 최근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 간 또는 국내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의 첨병인 기업의 역할 및 사회적 파급력이 강화되었다. 잘못된 회사법제는 기업 경쟁환경에 치명적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회사법의 역할에 대한 기대치 상승이다. 원래 회사법의 주된 기능은 대주주, 소수주주, 경영자, 채권자 등 회사의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다. 효율적 지배구조와 재무구조를 통해 기업의 파이를 키우는데 방점이 놓인다. 효율성에 주된 관심을 두기 때문에 분배 및 공정성은 노동법, 세법, 공정거래법 등 다른 법의 역할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회사법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녹여내야 한다는 관점이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일례로 회사법제가 지역사회에의 기여 등도 고민하게 되면 정치와의 연결고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최근 핫이슈인 주주의 비례적 이익 논란은 정치화의 좋은 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는 묘약처럼 얘기되더니, 그 도입이 배임죄 폐지와의 등가물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는 진영에 따라 찬반 목소리가 사생결단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일단 이렇듯 회사법이 과도하게 정치화되면 입법의 공과에 대한 차분한 논의는 실종된다. 사실 이사가 전체로서의 주주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특정 주주에 대한 편애는 기존 법제상 주주평등원칙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사의 전체 주주이익 추구의무를 회사법에 추가한다고 갑자기 증시가 활황국면으로 접어든다거나 이사들을 상대로 한 소송천국이 되기는 쉽지 않다. 논란의 발단은 합병 시 주주들에 불리한 합병비율을 추진한 이사의 책임 추궁이었다. 일부 하급심 판례들이 회사법 해석상 이사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특이한 결론을 내리자, 백가쟁명식 논의가 타오른 것이다. 위 결론이 부당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해석상 논란이 있다면 명확히 입법을 해야 한다는 점도 토를 달기 어렵다. 그렇다면 두 진영상 간극은 의외로 넓지 않다. 차분한 논의란 다음과 같다. 먼저 이사의 전체 주주이익 추구의무의 구체적 조문안을 성안하여 살펴볼 일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추상적 논의와 구체적 조문작업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무리 조문안을 다듬어도 과대 또는 과소하게 적용될 위험을 방지하기 어렵다면, 대신 합병유지청구권, 합병검사인제도 등 정밀타격(surgical attack) 방식을 논의하면 충분하다.

회사법의 정치화는 큰 문제일까? 자기가 공부하는 분야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책상물림 입장에서 흐뭇하게 생각될 수 있다. 어떤 법제이든 이른바 정무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도 분명하다. 하지만 과유불급. 회사법 개정에 정치색이 강해지면 진지한 논의는 사라지고 소모적 언쟁만 남는다. 정작 필요한 문구는 사라지고 자극적 조항만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응으로 우선 회사법 만능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투표권자들이 아우성칠 때 정치권은 뭐든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고 폼나는 회사법 개정을 추진할 유인이 있다. 물론 법적 인프라가 기업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그것이 주된 요소는 아니다. 다음으로 회사법 개정 과정의 코어 강화이다. 많은 경우 정치화는 어젠다 설정에서 비롯된다. 정부담당부서에서 긴 호흡으로 개정 필요사항을 주기적으로 리스트업하고 미리 전문적 견해를 축적해 놓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바탕 없이 정치적 잰걸음을 그때그때 반영하다 보면 우왕좌왕하며 실기하거나 엉뚱한 입법이 나올 수도 있다. 과잉정치의 시대에 회사법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필요는 없겠지만, 회사법 고유의 논리를 양보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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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2 호 | 발행일 2024년 05월 31일
하도급법상 하도급계약서에 관한 연구